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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뉴스

“귀농, 진정한 농민이 돼야 가능”

by 늙은여우한마리 2011. 9. 2.

“귀농, 진정한 농민이 돼야 가능”

통일촌 내려간 김상기씨 [조선일보]

눈매가 선한 30대 후반의 농부는 22일 아침, 짙은 안개 속에서 ‘탈탈’ 대는 경운기를 몰고 배나무 밭으로 향했다. 밭은 북한을 6㎞여 앞둔 민간인출입통제선 내 통일촌에 있다. “올겨울은 이상기온으로 땅이 진작 녹아 버렸어요.” 김상기(38)씨는 경운기에서 내린 뒤 가축 분뇨로 만든 천연비료를 삽으로 퍼 땅에 뿌리며 말했다.

김씨는 서울 소재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작은 신문사(매일노동뉴스) 데이터통신부장을 거치면서 남들과 엇비슷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반복적 일상에 지쳐갔고, 두 딸도 한시바삐 삭막한 도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김씨는 처남이 하는 가구업체 대리를 마지막으로 1999년 서울을 떠나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농촌으로 들어갔다. ‘농부’ 김씨에겐 ‘생태 농업’을 해보겠다는 뜻이 있었다.

                              김상기씨는 민통선 내 통일촌, 자신이 경작하는 밭에 비료를 뿌리며“마치 자식에게 밥을 떠다 
                            먹여주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의 목표는 친환경 생태농업이 한국에 뿌리 내리게 하는 것이다.
                             김건수 객원기자 kimkhans@chosun.com     

성공적 생태농업=김씨는 자기 소유 땅이 없다. 통일촌 일대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다. 젊은 농부 14명이 참여하는 작목반(作木班)을 2004년 조직, 품앗이 식으로 넓은 땅을 경작한다. 김씨는 이 작목반 회장이다. 그는 “옛말로 하면 소작농”이라 했다.

그러나 소작농 치곤 농업 전문가 냄새가 풍긴다. 배(6000평)·쌀(2500평)·단호박(1200평)·감자(2000평)·당근(1000평)·무배추(1000평) 등 키우는 품종이 다양하다. 가축 분뇨와 왕겨(벼의 겉겨)를 이용해 퇴비를 직접 만든다. 배 유기재배를 배우기 위해 충남 아산에서 먼저 이 일을 시작한 농부를 매년 찾아가기도 했다.

김씨가 내는 농산물은 전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무농약’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안정된 판로를 통해 시중가보다 30~40% 높은 가격에 팔고 있다. 산출량의 80~90%만 자기 몫으로 가져가므로 수입의 절대 규모는 도시생활 때보다 줄었지만, 저축규모는 오히려 늘었다.

어려움 각오해야=처음부터 김씨 앞에 성공의 길이 열린 건 아니다. 김씨가 농촌으로 들어올 때 수중엔 2000만원이 전부였다. 빈집을 전세 내는 데 1000만원이 나가고, 나머지 1000만원은 2년 만에 까먹었다. 처음 두 해 동안 시도한 고추·콩 유기농업도 극심한 가뭄 탓에 실패했다. 경기도 이천 농촌 출신이었지만, 농업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금실 좋던 아내와 다투는 밤이 많아졌다. 현실적 어려움에 부딪힌 김씨는 겨울 농한기 땐 건설 현장에 나가 막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한국의 농업이 너무 어렵고 척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정한 ‘농민’이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래도 그는 한번도 도시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웰빙(well-being) 바람이 불면서 김씨의 유기 생태농업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김씨는 “우리 가족 먹거리는 땅에서 나는 농산물로 해결되고, 자식 교육은 부모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만족은 물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그는 급속도로 도시화돼 가는 현대사회에서 자신이 땅과 물을 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김씨의 만족은 정신적인 면에서 나오는 듯했다.

“저라고 왜 문전옥답(門前沃畓)이 탐나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소유한 땅만 살리게 되는 겁니다. 더 많은 땅을 살리기 위해선 임대하는 게 효율적이죠. 법적 의미에선 제 땅이 아니지만 생태적 의미에선 제 소유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땅과 농산물은 자식 같은 존재다. 봄에 심은 씨앗이 파릇파릇 싹을 틔울 때면 아이가 태어날 때의 기쁨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했다. 가을 출하시기에 농산물들이 대형 마트로 정처 없이 팔려나갈 땐 허전한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김씨는 “차라리 돈을 적게 받더라도, 소비자와 대면해 땅과 생명의 의미를 설명한 뒤 물품을 넘기는 게 낫다”고 말했다.

“아무도 요즘 어린 세대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도시·산업화로 땅·물·하늘이 죽어가는데 한편에선 안전한 농산물만 찾고 있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 있습니까.” 김씨는 골판지 박스 위에 놓인 막걸리를 한잔 시원하게 들이켰다.

 ‘생태가치 실현 귀농’ 성공하려면…

전남 화순 도암면 박선후(36·고교 졸업 후 충청지역서 직장생활, 광주에서 신문보급소 운영하다 2006년 귀농)씨=이상과 현실은 분명 다르다. 무작정 ‘생태적·전원적 삶’을 꿈꾸며 왔다가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혀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자족적 생활을 한다 해도 매달 기본 생활비는 필요하기 때문에 일정한 소득을 창출하기까지의 경비는 마련해 와야 한다. ‘하루 8시간만 일하겠다’고 생각하고 오지만, 실제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뛰어야 한다.

유기축산으로 산란계 650마리를 키워 기본적 가계를 꾸리고 있다. 장차는 벼농사와 과수를 해보려 한다.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내려와 고생하면, 40~50대에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용기를 내 귀농하기를 바란다. 다만 ‘귀농학교’ 등을 통해 정보도 얻고, 도움도 받고, 함께할 사람도 만나고 하면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