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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뉴스

農夫(농부)가 아니라 ‘農富’입니다

by 늙은여우한마리 2011. 8. 11.

2006년 9월 17일

농학박사인 고위 공무원이 “직접 농사를 지어 농업이 사양산업이 아니라 미래산업임을 증명하겠다”며 사표를 냈다.

최성호(51) 전 충남도농업기술원장은 보름 전만 해도 국가직 2급의 고위 공무원이었다.

그는 1981년 충남대 농대를 나와 농촌진흥청에 다니면서 서울대 대학원에서 농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에는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미국 캔자스주립대에서 농학(식물병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남부러울 게 없어 보이던 그가 8월 31일 홀연히 공직을 떠났다.

올해 4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벤처농업박람회를 성공리에 개최해 조직에서 인정을 받은 데다 정년을 8년 10개월이나 남겨 두고 있던 그였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의 돌연한 사표 제출에 의아해했다.

농사를 짓겠다고 떠난 그의 퇴임사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껴 조기 은퇴를 한 것뿐이고 농사일은 소일거리일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12일 오후 대전에서 승용차로 1시간 반가량을 달려 그가 농사를 짓겠다고 들어간 충남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로 가 봤다.

그는 텃밭에서 손을 흔들며 기자를 맞이했다. 텃밭 관리기와 콤바인 등 농기계를 다루는 연습에 한창이었다.

가끔 정책 설명을 하기 위해 기자실을 찾던 깔끔한 모습의 공무원은 농민으로 변신 중이었다. 작업모를 쓴 그을린 얼굴, 덥수룩한 수염….

그의 돌연한 사표를 둘러싼 소문을 전하자 그는 껄껄 웃기만 하다가 입을 열었다.

“농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농민에게 강의해 왔지만 농촌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껴 왔다”며 “농업이 실제로 ‘돈 되는 장사’이고 ‘희망의 직업’이라는 확신을 이 마을에서 2년간 살면서 직접 몸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농가주택은 2004년 7월 농촌진흥청 환경생명공학과장에서 농업기술원장(예산)으로 부임하면서 구입했다. 이미 그때부터 마음은 농사꾼이었다.

최 전 원장은 이웃집 농민 이병우(51) 씨의 사례를 들려줬다. 한 동에 200평짜리 비닐하우스 120동에서 매년 봄배추(1월), 수박(4월), 열무(7월), 쪽파 또는 김장배추(9월)를 연이어 재배하는 그의 한 해 소득은 3억여 원.

최 전 원장이 충남도농업기술원장 시절에 7000만 원 안팎의 연봉을 받고 운전사가 딸린 2000cc짜리 승용차가 있었다는 말에 이 씨는 “농사가 더 낫다”고 말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경영 능력과 최신 기술을 갖춘 농민만이 성공한다는 것. 특히 그는 농민들의 실패 사례를 보면서 경영 능력의 부족을 절감했다.

연간 수입이 2000만 원에 불과해 변제 능력이 없으면서도 4000만 원짜리 콤바인을 사겠다며 융자를 신청하거나 비닐하우스도 평균 내구연한보다 훨씬 빨리 갈아 치우는 등 의욕은 좋지만 치밀한 경영 능력 없이 남들 하는 대로 농사를 짓다가 빚만 지는 농민을 그는 숱하게 목격했다.

농대 후배인 부인 이성숙(47) 씨는 처음에는 말렸지만 농부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그의 열정에 감화돼 요즘은 적극적인 후원자로 바뀌었다.

“주변에서는 정년이 지난 후에 농사를 지어도 늦지 않다며 말렸지만 실제 농업에 승부를 걸어 성공하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고추 등 기술적으로 어려운 작목을 선택한 뒤 철저히 준비해 2, 3년 뒤에는 저의 성공스토리를 보여 주겠어요. 농촌의 리더로서 와해된 농촌 공동체도 복원하고 싶고요.”

최 전 원장은 “아직 성공하지도 않은 농부가 인터뷰에 응한 것은 같은 뜻을 가진 젊은이들이 농촌에 돌아오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발췌>